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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호텔 | 이타미 준, 공간 시퀀스, 지역성

by 혜이니o 2026. 5. 27.

© podo hotel

 

제주도 7대 미립 건축물로 선정된 포도호텔은 단층 26개 객실로 이루어진 작은 규모의 호텔입니다. 처음 이 숫자를 접했을 때 솔직히 의아했습니다. 고작 26개 객실인데 어떻게 이 건물이 건축 답사의 성지가 됐을까, 하고요. 직접 가보고 나서야 그 이유를 이해했습니다.

이타미 준이 제주에 남긴 건축 철학, 포도호텔

포도호텔은 재일교포 건축가 이타미 준(본명 유동룡)이 설계한 작품으로, 2001년 완공과 동시에 건축계에 센세이션을 일으켰습니다. 이타미 준은 프랑스 파리의 기메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개최한 최초의 건축가이자 프랑스 예술문화훈장 수훈자로, 한국과 일본 양국에서 수많은 건축상을 수상한 인물입니다.

그의 건축 언어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개념이 바로 지역성(Regionalism)입니다. 지역성이란 특정 장소가 가진 역사, 기후, 문화, 지형 등의 고유한 특질을 건축 설계에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이 땅에서 자랐을 법한 건물"을 짓는 것입니다. 포도호텔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포도송이처럼 보인다는 이 건물은, 제주의 오름 능선과 전통 초가지붕을 모티브로 삼았습니다. 여기서 오름이란 제주 곳곳에 분포한 기생화산체로, 완만하게 솟아오른 화산 봉우리를 뜻합니다. 포도호텔의 지붕 라인은 바로 이 오름의 실루엣을 닮아 있습니다. 건물이 가로로 길게 누운 수평적 배치 역시 주변 자연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기 위한 계획으로, 이타미 준이 생전에 강조했던 "건물은 땅과 함께 숨 쉬어야 한다"는 철학이 그대로 구현되어 있습니다.

제가 처음 포도호텔을 마주했을 때 느낀 첫 감각은 압도감이 아니라 "낮게 숨 쉬고 있다"는 감각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럭셔리 호텔이라면 웅장한 파사드(façade)로 시선을 끌기 마련인데, 포도호텔은 오히려 그 반대였습니다. 파사드란 건물의 정면 외관, 즉 외부에서 가장 먼저 마주치는 입면을 의미하는 건축 용어입니다. 포도호텔의 파사드는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주변 풍경 속으로 스며드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이타미 준의 건축 세계를 기록한 다큐멘터리 〈이타미 준의 바다〉를 보면, 그가 현장에서 직접 타일을 굽고 조급해하지 않으며 공간에 진심을 다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담겨 있습니다. 현대 건축이 점점 완벽한 이미지를 향해 달려가는 것과는 정반대의 태도입니다(출처: 이타미준 건축문화재단).

공간 경험으로 완성되는 건축, 열림과 닫힘의 리듬

포도호텔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공간 시퀀스(Sequence)의 설계 방식이었습니다. 공간 시퀀스란 사람이 공간 안을 이동할 때 연속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장면들의 흐름을 의미합니다. 일종의 건축적 서사 구조입니다.

체크인을 마치고 복도를 걷고, 중정을 지나 객실에 도달하는 여정 속에서 창밖으로 보이는 제주의 풍경이 조금씩 달라집니다. 빛의 양이 시간에 따라 변하면서 공간의 표정이 바뀌고, 때로는 빛이 반사되며 전혀 다른 장면을 만들어냅니다. 제가 경험상 이건 사진 한 장으로는 절대 전달이 안 됩니다. 포도호텔은 정지된 이미지가 아니라 이동의 흐름 속에서 완성되는 건축입니다.

천장의 구조도 이 시퀀스의 일부입니다. 천장이 리듬감 있게 솟아오르는 구간에서는 시선과 호흡이 함께 열립니다. 그리고 안쪽으로 낮게 감기듯 내려오는 곡면에서는 묘한 안정감이 생깁니다. 이것은 단순한 조형적 선택이 아니라 사람의 심리와 감각을 조율하는 장치로 작동합니다. 건축에서는 이를 공간감(Spatial Quality)이라 부릅니다. 공간감이란 사람이 특정 공간 안에 있을 때 신체와 심리가 반응하는 총체적인 감각 경험을 뜻합니다.

포도호텔의 객실은 총 26개로, 한식과 서양식으로 나뉩니다. 한식 객실은 서까래가 드러나 있고 흙 마감 벽과 온돌 바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서양식 객실은 간결한 감각의 대리석 욕조와 함께 야외 테라스를 갖추고 있습니다. 모든 객실에는 아라고나이트 온천수가 제공되는데, 아라고나이트(Aragonite) 온천수란 칼슘 탄산염 광물인 아라고나이트 성분이 풍부하게 함유된 온천수로 약 42°C의 고온에서 분출되며 우윳빛을 띠는 것이 특징입니다. 최고급 객실인 프레지덴셜 스위트에는 야외 수영장과 전용 정원까지 마련되어 있어 말 그대로 호텔 안의 또 다른 호텔 같은 경험이 가능합니다.

포도호텔에서 럭셔리가 작동하는 방식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객실 수를 26개로 제한해 철저한 프라이버시를 확보
  • 사진보다 이동의 경험 자체가 핵심인 공간 시퀀스 설계
  • 한식·서양식으로 나뉜 객실별 맞춤형 자재와 욕조 구성
  • 전 객실 아라고나이트 온천수 개인 스파 제공
  • 오름 능선과 초가지붕에서 가져온 지붕 형태와 수평적 배치

지역성을 소비하지 않고 번역한 건축

많은 제주 숙소들이 현무암과 초가 형태를 장식처럼 사용합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의 발견이었습니다. 제주를 담은 건물이라고 해서 갔더니, 대부분은 제주의 이미지를 입힌 건물이지 제주로부터 나온 건물이 아니었습니다.

포도호텔은 다릅니다. 오름의 능선이 가진 수평적 흐름, 바람이 통하는 방향, 낮게 펼쳐진 민가의 스케일까지 공간 전체의 질서로 끌어들입니다. 건축 이론에서는 이것을 컨텍스추얼리즘(Contextualism)이라 부릅니다. 컨텍스추얼리즘이란 건물이 들어서는 주변 환경, 역사적 맥락, 도시 조직과의 관계를 설계의 핵심 조건으로 받아들이는 설계 방법론입니다. 이타미 준은 이 개념을 제주라는 장소에 가장 깊이 있게 적용한 건축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제가 직접 공간을 걸어다니며 느낀 것도 바로 이 지점입니다. 현무암을 썼는데 어색하지 않고, 초가지붕을 닮았는데 복고적이지 않습니다. 재료와 형태가 "제주처럼 보이려는" 것이 아니라 "제주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 차이는 결코 작지 않습니다.

포도호텔이 완공 이후 오랫동안 건축 답사의 성지로 유지되는 이유는 결국 이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공간들이 "보여지는 방식"을 먼저 고민하는 동안, 포도호텔은 "머무는 방식"을 훨씬 더 오래 고민했습니다. 이타미 준이 남긴 건축 유산은 제주도 내에서 방주교회, 수풍석관 등으로도 이어지는데, 이 건물들이 모두 같은 방식으로 장소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합니다(출처: 문화재청).

포도호텔을 방문할 계획이 있다면, 숙박을 하는 것을 권합니다. 낮 동안 답사만 해서는 이 건축의 절반도 경험하지 못합니다. 빛이 달라지는 아침과 저녁, 온천수에 몸을 담그고 테라스에서 오름을 바라보는 시간이 있어야 비로소 이타미 준이 설계한 감각의 리듬이 몸에 전달됩니다. 건축이 형태가 아니라 경험이라는 것을, 이 26개 객실짜리 작은 호텔이 아주 조용하게 증명하고 있습니다.


참고: https://blog.naver.com/ilivingsense/223721623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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