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으로 보면 그냥 돌로 쌓인 온천이다 싶을 때가 있습니다. 저도 처음엔 그랬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들어서는 순간, 목소리가 절로 낮아지고 걷는 속도가 느려졌습니다. 페터 줌토르가 1996년에 완공한 테르메 발스는 '보는 건축'이 아니라 '몸이 먼저 반응하는 건축'이었습니다. 이 글은 그 경험을 공간적, 건축적 언어로 풀어보려 합니다.
발스 규암과 지형, 테르메 발스가 풍경에 스며든 방식
스위스 그라우뷴덴 주의 산골 마을 발스는 인구 1,000명도 안 되는 작은 곳입니다. 줌토르는 이 지역에서 직접 채취한 발스 규암(Valser Quarzite)을 주재료로 선택했습니다. 규암이란 석영 입자가 고온·고압으로 압축된 변성암으로, 발스 지역 특유의 은빛 결과 층상 구조가 특징입니다. 단순히 지역 재료를 쓴 것이 아니라, 재료 자체가 건물의 표정이 되도록 설계한 셈입니다.
건물은 산비탈에 반쯤 파묻혀 있습니다. 줌토르는 이를 지형적 내포(Topographic Embedding)라고 개념화했는데, 쉽게 말해 건물이 땅 위에 놓이는 것이 아니라 땅의 일부로 삽입되는 방식을 뜻합니다. 옥상은 잔디로 덮여 있어서 멀리서 보면 건물인지 언덕인지 구분이 잘 되지 않을 정도입니다. 제가 직접 가서 보니, 이 결정이 단순한 미적 선택이 아니라는 걸 느꼈습니다. 자연광이 들어오는 방향, 소리가 흡수되는 방식, 온도 차이가 만드는 공기의 흐름까지 전부 지형과의 관계 속에서 계산된 것이었습니다.
줌토르는 재료와 장소가 형태를 결정하는, 거의 장인(Craftsman)적 설계 논리를 따른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테르메 발스는 그 논리가 가장 완성도 높게 구현된 사례로 건축계에서 인정받고 있으며, 줌토르는 이 프로젝트를 포함한 작업들로 2009년 프리츠커상(Pritzker Architecture Prize)을 수상했습니다. 프리츠커상이란 건축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최고 권위의 상으로, 매년 한 명의 생존 건축가에게 수여됩니다(출처: Pritzker Architecture Prize).
현상학적 공간 설계, 감각의 밀도를 건축으로 구현하다
테르메 발스를 이해하는 데 빠지지 않는 개념이 현상학적 건축(Phenomenological Architecture)입니다. 현상학적 건축이란 공간의 물리적 형태보다 그 공간 안에서 인간이 느끼는 감각적 경험을 설계의 중심에 두는 접근 방식입니다. 철학자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의 신체 지각 이론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줌토르는 이를 건축적 실천으로 가장 일관되게 구현하는 건축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습니다.
테르메 발스의 내부는 여러 개의 석조 구조물이 분할된 형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각 구조물 사이에는 캐필러리 조인트(Capillary Joint)라 불리는 좁은 틈이 있는데, 이 틈을 통해 자연광이 실처럼 흘러들어 옵니다. 캐필러리 조인트란 두 재료 사이에 의도적으로 만든 극히 좁은 개구부로, 빛과 공기를 조절하는 기능을 합니다. 저는 그 틈을 처음 봤을 때 솔직히 시공 하자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빛이 돌 표면을 타고 번지는 방식을 보는 순간, 이게 계산된 연출이라는 걸 단번에 알아챘습니다.
물온도와 소리도 설계의 일부입니다. 다양한 온도의 풀이 공존하고, 돌의 표면은 소리를 특정 방식으로 흡수·반사합니다. 일반 수영장처럼 소리가 튀지 않고, 묘하게 낮게 울리며 공간 속으로 가라앉습니다. 제 경험상 이건 좀 달랐습니다. 건축이 청각적 경험을 이렇게 정밀하게 조율할 수 있다는 걸 처음 실감한 공간이었습니다.
다만 이 지점에서 한 가지 의문을 품게 됩니다. 테르메 발스의 감각 경험은 철저하게 설계된 연출의 결과입니다. 자연에 스며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연을 아주 정교하게 편집한 장면에 가깝습니다. 방문객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줌토르가 의도한 방식으로 감각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게 아름다운 건지, 아니면 고요함마저 연출된 것이라는 점에서 일종의 역설인지, 저는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테르메 발스의 공간적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발스 규암을 구조재이자 표현재로 동시에 활용하여 재료와 형태가 일치하는 건축
- 지형적 내포 방식으로 건물을 산비탈에 삽입, 자연과 인공의 경계를 의도적으로 흐림
- 캐필러리 조인트를 통한 자연광 유입으로 시간에 따라 변하는 내부 조도 연출
- 분할된 석조 구조물이 만드는 다공성(Porosity) 공간 구성으로 각 사용자의 독립적 경험 보장
건축 순례지가 된 온천, 소비와 경험 사이
테르메 발스는 지금 건축가와 디자이너들이 전 세계에서 찾아오는 순례지(Pilgrimage Site)가 되었습니다. 순례지란 종교적 의미에서 출발한 개념이지만, 건축 맥락에서는 특정 공간이 하나의 상징적 준거점이 되어 전문가들이 직접 방문하여 체험하는 문화를 가리킵니다. 아이러니한 건, 침묵과 고요함을 이야기하는 공간이 동시에 세계적인 건축 아이콘으로 소비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건축학 분야에서 현장 방문 학습(Field Learning)은 도면과 사진으로는 전달되지 않는 감각적 층위를 직접 경험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테르메 발스는 이 점에서 교과서적인 사례로 자리 잡았습니다. 실제로 많은 건축 대학원 프로그램이 스위스 현장 답사 일정에 이 공간을 필수 방문지로 포함시키고 있습니다(출처: MArch Valencia).
제가 직접 그 공간에 있으면서 느낀 건, 사람들이 이곳에서 단순히 쉬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 현대 도시에서 점점 사라져가는 감각적 경험 자체를 찾아오고 있다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화면이 지배하는 일상 속에서, 빛의 속도와 물의 온도와 돌의 무게를 몸으로 느끼는 시간은 점점 희귀해지고 있으니까요. 어쩌면 줌토르는 건물을 설계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천천히 감각을 회복하는 시간을 설계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결국 테르메 발스가 오래 기억에 남는 이유는, 거대한 형태나 화려한 기술 없이도 건축이 사람의 감정을 이토록 섬세하게 움직일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빛과 돌, 물과 침묵만으로 쌓아 올린 공간이 이렇게 깊은 울림을 만든다는 것, 건축을 공부하든 그렇지 않든 한 번쯤 직접 가서 느껴볼 가치가 있습니다. 논문이나 사진으로는 절대 대체되지 않는 경험이 그곳에 있습니다.
참고: https://www.marchvalencia.com/en/blog/therme-vals-by-peter-zumth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