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만 타이중에 12년 만에 완성된 공공건축이 있습니다. 미술관과 도서관을 하나로 합친 그린 뮤지엄브러리입니다. 사진으로 처음 접했을때, 솔직히 "건물인가, 공원인가" 헷갈렸습니다. 그게 이 건물을 계속 들여다보게 된 이유였습니다.
공원 산책처럼 스며드는 타이중 그린 뮤지엄브러리의 공간 경험
타이중 그린 뮤지엄브러리는 건물 하나를 정면에서 마주하는 느낌이 아닙니다. 67만 ㎡ 규모의 센트럴파크 안에 자리 잡고 있어서, 공원을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문화 공간 안으로 발을 들이게 되는 구조입니다. 제가 사진과 도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느낀 건, 이 건물이 "오세요"라고 소리치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냥 거기 있고, 사람들이 흘러들어오는 방식입니다.
SANAA(사나)가 이 프로젝트를 설계했습니다. SANAA란 일본 건축가 세지마 가즈요와 니시자와 류에가 1995년 설립한 건축 사무소로, 2010년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세계적인 팀입니다. 프리츠커상이란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최고 권위의 국제 건축상입니다. 이들의 작업은 일관되게 얇고 가볍고 투명한 구조를 추구하는데, 타이중에서도 그 방식이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건물은 단일 매스가 아닌 8개의 볼륨(volume)으로 나뉩니다. 볼륨이란 건축에서 독립된 덩어리 단위를 가리키는 용어로, 각각의 덩어리가 느슨하게 연결되어 하나의 건물군을 이루는 방식입니다. 유리와 금속 메시(mesh)로 이루어진 이 구조물들은 햇빛과 바람을 직접 받아들이며 내부에서도 바깥 풍경이 계속 시야에 들어옵니다. 제 경험상 이런 건물은 계절마다, 날씨마다 전혀 다른 공간처럼 느껴집니다. 흐린 날과 맑은 날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질 테니까요.
타이중 그린 뮤지엄브러리의 공간 구성에서 핵심적으로 작동하는 요소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8개의 독립 볼륨이 작은 다리와 경사로, 계단으로 느슨하게 연결된 구조
- 어느 방향에서도 접근 가능한 다방향 진입 동선
- 27m 높이 아트리움과 나선형 경사로로 이어지는 5개의 갤러리
- 유리와 금속 메시 외피로 내·외부 경계를 최소화한 파사드
경계 해체, 미술관과 도서관이 하나의 시퀀스가 되는 방식
이 건물에서 제가 가장 인상적으로 본 지점은 미술관과 도서관을 분리된 기능으로 보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대만 최초로 공공 미술관과 도서관을 통합한 사례라는 점만 봐도 이건 상당히 실험적인 시도입니다.
보통 미술관은 감상을 위해 동선을 통제하는 공간입니다. 작품 앞에서 멈추고, 정해진 방향으로 이동하는 흐름을 유도합니다. 반면 도서관은 자리를 정해 앉고 집중하는 공간이죠. 두 공간의 성격은 서로 꽤 다릅니다. 그런데 타이중 그린 뮤지엄브러리는 이 두 가지를 하나의 시퀀스(sequence) 안에 녹였습니다. 시퀀스란 건축에서 공간 경험의 흐름, 즉 이동하면서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장면들의 연결을 의미합니다. 전시를 보다 자연스럽게 도서관과 마주하게 되고, 책을 읽다 시선을 들면 공원이 보이는 구조입니다.
직접 걸어보지는 못했지만, 도면과 사진을 꼼꼼히 보면서 든 생각이 있습니다. 이 공간은 목적지를 정해놓고 이동하는 방식보다, 그냥 흘러다니는 사람에게 더 잘 맞을 것 같다는 거였습니다. 아트리움(atrium)에서 나선형 경사로를 따라 올라가면 갤러리가 이어지는 구조인데, 아트리움이란 건물 내부에 채광을 위해 뚫어둔 중앙의 열린 홀 공간입니다. 27m 높이라면 올려다보는 순간부터 압도되는 스케일이겠죠.
한 가지 생각도 더해야겠습니다. 이런 SANAA식의 느슨하고 개방적인 공간 구성은 굉장히 이상적인 공공성을 전제로 합니다. 아름답지만, 동시에 방향 감각을 흐리게 하고 운영 효율을 낮출 가능성도 있습니다. "자유롭게 머무르는 경험"이 실제로는 시간 여유가 있는 사람에게 더 잘 작동하는 방식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계속 걸립니다.
공공건축이 도시 브랜드가 되는 시대
타이중 그린 뮤지엄브러리는 최근 아시아 도시들이 추구하는 공공건축의 방향을 아주 잘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합니다. 거대한 기념비적 조형물 대신, 자연과 문화와 휴식을 하나의 일상 풍경처럼 묶어내는 방식입니다. 실제로 공공 문화시설이 도시 경쟁력의 핵심 지표로 자리 잡고 있다는 흐름은 수치로도 확인됩니다. OECD 보고서에 따르면 문화 인프라에 대한 공공 투자는 지역 주민의 삶의 질 지표와 직접적인 상관관계를 보입니다(출처: OECD).
이 건물이 2013년 국제 설계 공모에서 당선된 뒤 완공까지 12년이 걸렸다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공공 프로젝트에서 설계 당선 이후 이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는 건 드문 일이 아니지만, 반대로 그 긴 시간 동안 도시와 주민의 기대치가 계속 변화해왔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도시 건축 프로젝트의 장기적 맥락에 관한 연구들을 보면, 완공 시점의 사회적 맥락이 설계 당시와 달라지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 지적됩니다(출처: 건축도시공간연구소).
제가 이 프로젝트에서 가장 오래 생각하게 된 건 공공건축의 역할 변화입니다. 예전의 공공건축은 기능과 상징성이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청사는 권위의 상징, 미술관은 예술의 전당, 도서관은 지식의 창고. 각각 목적이 명확했습니다. 그런데 타이중 그린 뮤지엄브러리는 그 경계를 허물고, 문화를 일상 인프라로 재정의하려 합니다. 거창한 말로 들릴 수 있지만, 사람들이 "미술관 가야지"가 아니라 "공원 산책하다 들어가 봤어"라는 경험을 하게 만드는 것, 그게 이 건물이 노리는 지점이라고 봅니다.
타이중 그린 뮤지엄브러리를 두고 '랜드마크'라는 표현이 많이 쓰이는데, 솔직히 저는 그 단어가 조금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랜드마크는 멀리서도 눈에 확 들어오는 존재감이 있어야 하는데, 이 건물은 오히려 공원 안에 조용히 스며드는 쪽을 선택했으니까요. 어쩌면 그게 이 건물이 선택한 방식의 핵심일 수도 있습니다. 크게 서 있기보다 조용히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것. 타이중에 갈 기회가 생긴다면, 목적지로 찾아가기보다 공원 산책 중에 자연스럽게 들어가 보시길 권합니다. 그게 이 공간을 제대로 경험하는 방법일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