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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슬(The Vessel) | 허드슨야드, 경험 소비 공간, 참여형 공간

by 혜이니o 2026. 5. 17.

© hudsonyardsnewyork

 

처음 베슬을 봤을 때, 저는 이게 건축물보다는 조각품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2,500개의 계단이 꽃봉오리처럼 피어오르는 구조물 앞에서 든 첫 생각은 "이걸 왜 만들었지?"였습니다. 그런데 그 의문이 가시기도 전에 이미 줄을 서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베슬은 그런 곳입니다.

베슬은 어떻게 허드슨야드의 수직 광장이 되었을까

베슬은 허드슨 야드 재개발 프로젝트(Hudson Yards Development Project)의 일환으로 2019년 완공되었습니다. 허드슨 야드 재개발 프로젝트란 맨해튼 서쪽의 낡은 철도 차량기지 부지를 주거·상업·문화 복합공간으로 탈바꿈하는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민간 부동산 개발 사업을 말합니다. 그 중심에 영국 건축가 토마스 헤더윅(Thomas Heatherwick)이 설계한 베슬이 놓였습니다.

헤더윅은 산업 디자인을 전공한 건축가입니다. 그래서인지 그는 건축물을 고정된 구조물이 아니라 도시 안에 놓인 거대한 가구, 즉 어반 퍼니처(Urban Furniture)의 관점으로 바라봅니다. 어반 퍼니처란 도시 공간 속에서 사람들이 실제로 사용하고 상호작용하는 구조물을 말하는 개념입니다. 베슬이 단순한 조형물로 끝나지 않고 직접 오르내릴 수 있도록 설계된 것도 바로 이 철학에서 비롯됩니다.

형태의 출발점은 인도의 스텝웰(Stepwell)이었습니다. 스텝웰이란 건기에 수위가 낮아진 지하수를 길어 올리기 위해 수십 개의 계단을 땅 아래로 깊게 파내려 간 인도 전통 계단식 우물 구조를 의미합니다. 헤더윅은 이 구조를 뒤집어 하늘로 피어오르게 했습니다. 계단과 계단 사이에 미세한 각도를 더해 위에서 내려다보면 완벽한 원형이 되도록 했고, 그 형태가 위로 갈수록 점점 넓어지며 전체적으로 거대한 항아리 실루엣을 이루게 만들었습니다.

베슬의 외관을 감싸는 소재도 단순하지 않습니다. 폴리시드 코퍼 컬러드 스틸(Polished Copper-colored Steel), 즉 광택 처리된 구리빛 강철 패널이 외벽 전체를 덮고 있습니다. 이 소재는 주변의 하늘과 빌딩 숲, 그리고 그 앞에 선 사람들을 거울처럼 반사합니다. 시간대와 날씨에 따라 표면에 맺히는 풍경이 달라지기 때문에, 같은 구조물이지만 오전과 오후에 전혀 다른 인상을 줍니다. 제가 직접 찾아갔을 때 오후 햇살이 로즈골드빛으로 물드는 외벽을 보며 잠깐 멍하니 서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베슬이 하이라인(The High Line)의 끝자락에 위치한다는 점도 공간적으로 중요합니다. 하이라인이란 맨해튼 서쪽의 폐철로를 공중 산책로로 재생한 선형 공원을 말합니다. 하이라인의 수평적 흐름을 따라 걷다가 베슬의 수직적 구조를 올려다보는 시퀀스는, 도시를 경험하는 방식 자체를 재편합니다.

베슬의 구조적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계단 수: 2,500개, 난간 길이 약 1.6km
  • 소재: 폴리시드 코퍼 컬러드 스틸 패널
  • 설계 개념: 인도 스텝웰의 현대적 재해석
  • 위치: 하이라인 북단, 허드슨 야드 광장 중앙
  • 설계자: 토마스 헤더윅 스튜디오(Heatherwick Studio)

경험 소비 공간이라 불리는 이유

베슬이 공공에 개방된 이후 많은 평론가들은 이 구조물을 21세기형 공공 공간의 새로운 모델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저는 그 평가에 반쯤은 동의하고, 반쯤은 고개를 갸웃하게 됩니다.

올라가는 경험 자체는 분명 독특합니다. 과거의 전망대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통유리 너머 도시를 바라보는 단방향 구조였다면, 베슬은 계단을 오르는 내내 맞은편 계단의 사람들과 눈이 마주칩니다. 도시 풍경과 그 풍경을 소비하는 사람들이 동시에 시야에 들어오는 구조입니다. 제가 직접 올라가 봤을 때, 어느 순간 뉴욕 스카이라인보다 반대편 계단을 오르는 사람들의 표정을 더 오래 바라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 자체가 이 공간의 본질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불편한 질문도 따라왔습니다. 베슬에는 특별한 프로그램이 없습니다. 전시도, 공연도, 서사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계단을 오르고, 사진을 찍고, 내려옵니다. 그 반복 속에서 "경험했다"는 감각이 남는지, 아니면 "소비했다"는 감각이 남는지 묻고 싶어집니다.

SNS 인스타그래머빌리티(Instagrammability)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인스타그래머빌리티란 어떤 장소나 사물이 소셜 미디어에 올리기 좋은 시각적 매력을 갖추고 있는 정도를 뜻하는 신조어입니다. 많은 분들이 베슬을 단순히 "사진 찍기 좋은 장소"로 소비하는 이유가 바로 이 인스타그래머빌리티에 최적화된 설계 때문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는데, 저는 그 지적이 틀리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계단을 오르는 행위 자체는 반복되지만, 그 끝에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지는 않습니다. SNS 피드를 끝없이 내리는 행위를 공간으로 구현한 것 같다는 인상이 그래서 생겼습니다.

도시 재생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허드슨 야드 프로젝트 전체에 대한 시각은 엇갈립니다. 하이라인이 오래된 철로 위에 시민의 산책로를 만든 시민 주도 재생의 상징으로 평가받는 것과 달리, 베슬과 허드슨 야드는 대형 개발 자본이 주도한 고급화(Gentrification) 프로젝트의 상징이라는 비판도 받습니다.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란 낙후 지역이 재개발되면서 기존 거주민이나 상권이 높아진 임대료에 밀려나는 현상을 말합니다. 뉴욕 시립대학교 도시연구소에 따르면 허드슨 야드 개발 이후 인근 지역 임대료는 일부 구역에서 30% 이상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출처: CUNY Urban Research Center).

공공성과 상업성이 이렇게 복합적으로 얽힌 구조물은 사실 많지 않습니다. 그 점이 베슬을 단순한 관광지로 보기 어렵게 만들기도 합니다.

능동적으로 도시를 경험하는 참여형 공간

베슬은 2019년 개장 이후 빠르게 뉴욕의 대표적인 방문 명소가 되었지만, 동시에 복수의 투신 사고가 발생하며 2021년부터 안전 문제로 한동안 폐쇄되는 과정을 겪었습니다. 구조적으로는 완전히 열려 있는 공간이 안전 측면에서 얼마나 취약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사례이기도 합니다. 현재는 방문 방식과 안전 기준이 강화된 형태로 운영 중입니다.

이 사건은 베슬의 설계 철학에 대한 또 다른 질문을 남겼습니다. 개방성과 투명성을 극대화한 공간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안전한 경험을 보장하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뉴욕시 공원국(NYC Parks Department)은 도시 내 공공 시설물의 안전 기준을 정기적으로 검토하고 있으며, 베슬 사례 이후 고층 개방형 구조물에 대한 안전 가이드라인이 재정비되었습니다(출처: NYC Parks).

그럼에도 제가 직접 경험한 베슬은, 지금 시대 사람들이 공간에서 무엇을 원하는지를 매우 정확하게 읽어냈다는 점에서 인상적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수동적으로 도시를 바라보는 공간을 원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걷고, 찍고, 공유하고, 스스로 장면의 일부가 되는 경험을 원합니다. 베슬은 그 욕구를 건축적으로 가장 솔직하게 구현한 구조물 중 하나입니다.

 

저는 베슬의 공허함 자체가 지금 시대를 반영하는 가장 정직한 설계 언어라고 생각합니다. 내용 없이 경험만 있는 공간, 그것이 불편하다면 그 불편함은 베슬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을 향한 것입니다.

베슬을 방문할 계획이 있다면, 가능하면 이른 오전이나 해 질 무렵에 찾아가 보길 권합니다. 폴리시드 스틸 표면에 맺히는 빛의 온도가 하루 중 가장 달라지는 시간대이고, 그때 베슬은 단순한 계단 구조물이 아니라 정말 살아있는 도시의 표면처럼 느껴집니다. 제 경험상 그 순간이 이 구조물을 가장 솔직하게 이해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참고: https://blog.naver.com/thecityscape/224155023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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