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술관에 갔는데 전시 작품보다 벽이 더 기억에 남은 적 있으신가요? 저는 파주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에서 처음으로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분명히 전시를 보러 갔는데, 나오는 길에 머릿속에 남은 건 흰 벽 위를 천천히 미끄러지던 빛이었습니다. 건축이 전시물을 압도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건축 자체가 이미 하나의 작품이었다는 뜻입니다.
알바루 시자가 출판사에 지은 미술관,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의 정체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은 해외 문학을 국내에 소개해온 출판사 열린책들이 2010년 경기도 파주시 문발로에 세운 미술관입니다. 출판사가 미술관을 짓는다는 발상 자체가 이미 낯설었는데, 설립자인 홍지웅 대표가 선택한 건축가가 포르투갈의 알바루 시자(Álvaro Siza)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 더 눈길이 갔습니다.
알바루 시자는 '모더니즘 건축의 마지막 거장'이자 '건축의 시인'으로 불리는 인물입니다. 모더니즘 건축(Modernism Architecture)이란 장식을 배제하고 기능과 구조의 순수성을 강조하는 20세기 건축 사조로, 시자는 여기에 장소성과 인간의 감각을 녹여내는 방식으로 자신만의 언어를 만들었습니다. 1992년 건축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Pritzker Architecture Prize)을 수상한 그의 이력은 이미 세계 건축계에서 충분히 검증된 것이기도 합니다(출처: Pritzker Architecture Prize).
건물 외관을 처음 봤을 때,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지상 3층, 지하 1층, 대지 1,400평 규모의 건물인데 멀리서 보면 그냥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입니다. 장식도 없고, 색도 없고, 뭔가를 강하게 주장하는 파사드(Facade)도 없습니다. 파사드란 건물의 정면부를 가리키는 건축 용어로, 요즘 많은 미술관들이 첫인상을 극대화하기 위해 파사드에 과감한 조형을 쏟아붓는 것과 비교하면 미메시스는 거의 무표정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그 무표정이 묘하게 시선을 붙잡습니다.
직접 겪어보니, 이 건물은 가까이 갈수록 태도가 달라집니다. 입구 쪽으로 다가가면 두 개의 거대한 콘크리트 매스(Mass)가 날개처럼 펼쳐진 형상이 보이는데, 매스란 건축에서 건물의 부피감과 덩어리감을 표현하는 개념입니다. 상부는 여백이 가득한 벽면이고 하부에는 창과 문이 뚫려 있어, 이 대조가 건물에 묘한 긴장감을 만들어냅니다.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을 경험할 때 놓치면 아쉬운 포인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외부에서 볼 때는 직선 위주의 정면과 곡선 위주의 측면이 전혀 다른 건물처럼 보입니다.
- 지하층 중정(안뜰)에서는 곡선으로 뚫린 천장 사이로 나무 한 그루가 지상을 연결합니다.
- 3층 전시실은 이중 천창(天窓) 구조로, 자연광이 하루 종일 방향을 바꾸며 공간의 표정을 바꿉니다.
- 나선형 계단을 오를 때마다 벽면에 닿는 빛의 각도가 미세하게 달라집니다.
자연광이 재료가 되는 공간, 몸으로 기억하는 건축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건물이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제가 직접 들어가 봤는데, 이 반전이 미메시스의 핵심이라고 느꼈습니다. 바깥은 그렇게 무겁고 닫혀 있었는데, 안은 놀라울 만큼 유기적이고 열려 있습니다.
미메시스는 가급적 인공조명을 배제하고 자연광을 주요 광원으로 사용합니다. 천창(Skylight)이란 지붕에 설치된 채광창으로, 인공 조명 없이도 전시 공간 전체에 빛을 고르게 공급하는 장치입니다. 3층 전시실의 천창에서 떨어지는 빛은 흰 곡면 벽을 따라 반사되며 1층까지 전달됩니다. 오전에 방문했을 때와 오후에 방문했을 때의 공간감이 다르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는데,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다른 정도가 아니라 거의 다른 공간처럼 느껴집니다.
일반적인 미술관이 작품 보호를 위해 자외선을 차단하고 조도를 일정하게 통제한다면, 미메시스는 오히려 빛의 변화를 공간의 재료로 적극 활용합니다.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빛의 방향과 강도가 흰 벽면 위에서 다른 음영을 만들고, 그 음영이 전시 작품과 함께 새로운 장면을 구성합니다. 전시를 보다가 어느 순간 작품보다 벽면 위를 미끄러지는 빛을 더 오래 바라보고 있었다는 걸 알아차렸을 때, 이 건축이 무엇을 하려는 건지 조금 이해가 됐습니다.
시자의 건축에서 또 하나 인상적인 건 동선(動線) 설계입니다. 동선이란 공간 안에서 사람이 이동하는 경로를 설계하는 개념으로, 미메시스의 동선은 명확한 방향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1층 전시실은 곡선을 따라 돌다 보면 자연스럽게 원점으로 돌아오는 구조입니다. 나선형 계단은 서두르게 만들지 않습니다. 2층 로비는 단순한 통로가 아니라 1층을 내려다보고 빛의 교차를 감상할 수 있는 전망 지점으로 기능합니다.
감각이 기억하는 공간체험
이 건물은 사진으로만은 설명되지 않습니다. 걷고, 멈추고, 올려다보고, 다시 돌아보는 과정 안에서 공간이 완성됩니다. 미메시스를 다녀온 사람들이 "특정 장면보다 몸이 기억하는 감각이 남는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알바루 시자의 수많은 스케치를 보면 그가 각 시점에서 이루어지는 공간 경험을 얼마나 중시했는지 드러나는데, 미메시스는 그 철학이 가장 집약적으로 구현된 사례 중 하나로 평가받습니다(출처: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 공식 사이트).
출판사가 미술관을 지었다는 배경도 공간의 성격과 묘하게 맞닿아 있습니다. 기업 미술관들이 브랜드 이미지를 위한 상징 건축으로 흐르는 경우가 많은데, 미메시스는 그보다 훨씬 조용합니다. 카페와 서점, 전시가 한 흐름 안에 놓여 있고, 공간이 사람을 급하게 밀어내지 않습니다. 책을 읽다가 빛을 보고, 전시를 보다가 창밖을 보게 되는 흐름. 이 미술관에서는 "전시를 봤다"기보다 "머물렀다"는 감각이 더 강하게 남습니다.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은 알바루 시자의 건축 철학을 가장 직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화려하지 않은데 이상하게 강하고, 큰 목소리를 내지 않는데 오래 남는 건축입니다. 파주 출판도시 일대를 방문할 계획이 있다면, 미메시스는 그냥 스쳐 지나가기엔 아까운 공간입니다. 가능하다면 오전과 오후 시간대를 달리해서 두 번 방문해보시길 권합니다. 같은 건물인데 빛이 달라지면 공간이 달라집니다. 그 차이를 직접 겪어보는 것이 이 미술관을 제대로 경험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참고: https://www.cultura.co.kr/news/articleView.html?idxno=28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