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글라르 호텔 | 설계 철학, 지역성 소비, 공간 언어

by 혜이니o 2026. 5. 17.

© Piotr Maciaszek

 

폴란드 볼린 섬에 생긴 글라르 호텔을 처음 봤을 때,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거친 목재에 흙벽 질감, 호수 뷰까지. 요즘 유행하는 자연주의 럭셔리 호텔의 공식을 그대로 따른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알면 알수록 이 호텔은 그냥 분위기 좋은 숙소가 아니었습니다. 고고학자와 역사학자까지 불러 앉혀 놓고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저는 보는 시각 자체가 달라졌습니다.

글라르 호텔의 설계 철학

제가 직접 취재 자료를 뒤져봤는데, 이 호텔을 설계한 노케 아키텍츠(NOKE Architects)가 현장 리서치에 쏟은 시간이 꽤 깁니다. 바르샤바 기반의 건축가 피오트르 마치아셰크와 카롤 파스테르나크는 볼린 섬을 여러 차례 직접 방문했고, 폴란드 과학원 고고학자들과 직접 만나 9~12세기 볼린의 역사를 배웠습니다. 슈체친 역사박물관에 전시된 토양 단면도 직접 연구했다고 하더군요.

이런 리서치 방식을 업계에서는 컨텍스추얼 디자인(Contextual Design)이라고 부릅니다. 컨텍스추얼 디자인이란 공간이 위치한 장소의 역사·문화·자연 환경을 설계의 출발점으로 삼는 방식으로, 단순히 지역 재료를 쓰거나 전통 패턴을 벽에 붙이는 수준을 훨씬 넘어섭니다. 보통 로컬 감성을 내세우는 호텔들이 로컬 재료 몇 가지나 전통 패턴 정도를 가져오는 데 그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글라르 호텔이 그 선을 꽤 명확하게 넘었다고 봅니다.

 

호텔 이름인 '글라르(Glar)'부터 그렇습니다. 볼린 섬 부족들이 숭배하던 성스러운 말의 이름에서 따왔고, '빛나는 것'을 뜻합니다. 단순히 어감이 좋아서 붙인 이름이 아니라는 거죠. 계단 벽면을 손으로 빚어 마감한 흙벽으로 마무리한 것도, 박물관에서 본 토양 단면에서 영감을 받은 결과입니다. 바위를 직접 깎아 만든 세면대는 발트해 파도가 오랜 세월 단단한 바위를 침식하는 자연의 방식에서 착안했고요. 이 디테일들을 알고 나서 다시 보면, 공간 전체가 다르게 읽힙니다.

글라르 호텔이 글로벌 디자인 어워드 디진 어워즈(Dezeen Awards) 2024 호텔 인테리어 롱리스트와 지속 가능 인테리어 롱리스트에 동시에 이름을 올린 건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결과입니다. 디진 어워즈란 영국 건축·디자인 전문 미디어 디진(Dezeen)이 매년 선정하는 국제 디자인 시상으로, 심미성뿐 아니라 지속가능성과 사회적 맥락까지 평가 기준에 포함합니다(출처: Dezeen).

지역성 소비, 로컬은 어떻게 럭셔리 공간이 되는가

지역의 역사와 유물을 공간에 끌어들이는 방식을 헤리티지 인테그레이션(Heritage Integration)이라고 합니다. 헤리티지 인테그레이션이란 특정 장소가 가진 역사적·문화적 유산을 공간 디자인 언어로 번역하는 접근 방식으로, 단순한 복원이나 전시가 아니라 현대적 공간 경험 안에 녹여내는 작업을 말합니다. 글라르 호텔은 이 접근을 꽤 진지하게 실행한 편입니다.

과거 화폐로 쓰이던 도자기·돌·호박 구슬 목걸이는 각 객실에 세워진 나무 조각품과 레스토랑 조명으로 재해석됐고, 모래 위에 손가락으로 글씨를 쓰는 행위에서 영감을 받은 원형 무늬 장식 띠가 벽 상단을 가로지릅니다. 수영장 바닥에는 지역 아티스트 올라 니엡수이가 제작한 모자이크 작품이 깔려 있는데, 큰 수영장에는 물고기가, 작은 수영장에는 볼린 섬 인근에서 실제로 마주칠 수 있는 백조가 그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공간들을 볼 때마다 저는 같은 질문이 남습니다. 지역의 역사와 기억을 존중하는 건 분명 의미 있는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그것들이 결국 고급 숙박 경험을 위한 감성 자산으로 재편집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거죠. 실제 지역 주민의 삶이라기보다, 여행자가 원하는 이상적인 로컬 이미지를 세련되게 구성한 장면처럼 느껴지는 순간도 있습니다.

이 호텔이 다른 점은 적어도 설계 과정에서 지역 전문가와 장인을 실제로 협업에 끌어들였다는 사실입니다. 글로벌 럭셔리 호텔 체인들이 현지 감성을 소비하는 방식과는 결이 다릅니다. 그 차이가 공간의 밀도를 만든다고 저는 봅니다.

글라르 호텔의 설계에서 주목할 핵심 포인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고고학자·역사학자·지역 장인과의 실질적 협업을 설계 프로세스에 포함
  • 유물과 자연 현상(파도의 침식, 토양 단면)을 재료와 형태 언어로 번역
  • 지역 아티스트의 작품을 공간 장식이 아닌 공간 구조의 일부로 통합
  • 역사 설명을 직접 노출하지 않고 감각과 촉감으로 전달하는 방식 채택

공간 언어, 눈보다 손이 먼저 반응하는 햅틱 디자인

제가 직접 가보지는 못했지만, 자료를 보면서 가장 먼저 궁금해진 건 재료의 촉감이었습니다. 글라르 호텔은 매끈하게 정제된 럭셔리 호텔과는 방향이 다릅니다. 손으로 빚은 흔적이 남아 있는 흙벽, 솔질로 결을 살린 목재, 바위를 깎아낸 세면대. 시각보다 촉각이 먼저 반응하도록 설계된 공간처럼 보입니다.

이를 햅틱 디자인(Haptic Design)의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햅틱 디자인이란 시각 중심의 공간 연출에서 벗어나 촉각·질감·무게감 같은 신체적 감각을 공간 경험의 핵심 요소로 삼는 디자인 철학입니다. 요즘 럭셔리 공간 디자인의 흐름이 점점 이쪽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시각도 있는데, 글라르 호텔은 그 방향과 맞닿아 있으면서도 단순한 유행 추종이 아니라 지역의 물성(物性)에서 출발했다는 점이 다릅니다.

또 이 호텔이 과거를 굉장히 조용하게 다룬다는 점도 인상적입니다. 거대한 설명 패널이나 직접적인 역사 재현 대신, 재료와 디테일 안에 기억을 숨겨둡니다. 투숙객은 무언가를 배우기보다, 공간을 머무르며 천천히 감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공간은 새 건물인데도 이상하게 오래된 장소 같은 분위기를 만든다는 평가가 나오는 겁니다.

유네스코(UNESCO)가 문화 유산 보존의 현대적 재해석과 관련해 강조하는 것도 이와 비슷한 맥락입니다. 과거를 그대로 복원하는 것보다 현재의 삶 속에서 유산이 살아 숨쉬게 하는 방식이 더 지속 가능하다는 관점이죠(출처: UNESCO). 글라르 호텔은 그 방식을 호텔이라는 장르 안에서 실험한 사례로 읽힙니다.

 

결국 글라르 호텔이 남기는 인상은 이겁니다. 지역성과 지속가능성을 마케팅 언어로 쓰는 공간은 많지만, 그것을 실제 설계 과정의 출발점으로 삼은 공간은 드뭅니다. 이 호텔은 적어도 그 장소의 기억을 먼저 이해하려 했고, 그 태도가 공간의 깊이를 만들고 있습니다. 볼린 섬이 어떤 곳인지 전혀 모르고 들어가도 뭔가 다르다는 감각이 올 것 같고, 알고 들어가면 그 감각이 더 선명해지는 곳. 그게 글라르 호텔이 단순한 여행지 이상으로 기억될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참고: https://nokearchitects.com/hotel-glar-conference-spa/


소개 및 문의 · 개인정보처리방침 · 면책조항

© 2026 블로그 이름